선상만세운동 소개

불타는 삼월, 위대한 독립 3·1운동기념
행주나루터선상만세운동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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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만세운동 소개

행주나루터선상만세운동 소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계기로 행주에서는 3월 11일, 23일, 28일 세 차례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주민들은 일본경찰이 쫓아오자 배를 타고 한강 한가운데로 나가 만세를 외치며 하류를 향해 유유히 내려갔다.

민주혁명의 대열 ‘행주나루터 선상만세운동’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배를 탄 주민들
전국 유일의 한강 위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곳

일제의 무단통치와 우리민족의 분노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우리민족은 일제의 폭압 앞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무단통치였다.

무단통치는 1910년대 일본이 우리에게 행했던 통치방법이며 헌병경찰통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민족의 모든 군사·정치·문화활동을 금지하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식민통치를 해나갔다. 일본헌병과 경찰이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했고, 고위관리는 일본인이 차지했다.
태형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조선태형령’을 시행해 우리민족을 분노케 했다.

민족자결주의와 김규식의 파리행

러던 차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윌슨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1월 전후에 세계 평화수립의 원칙으로서 14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이때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는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를 안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2월1일 김규식을 파리에 보냈다.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한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게 했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했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라

918년 11월,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 무오년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부른다.

만주·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신채호, 안창호, 박은식, 이상룡, 이시영, 김좌진, 김규식, 이승만, 김약연,
이동휘, 이동년, 문창범 등 39명이 서명했다. 작성자는 조소앙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일본의 합병수단은 사기·강박·불법·무력에 의한 것이고, 일본의 합병은 세계문화를 저해하는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또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리와 정의와 법리에 비추어 합병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2천만 동포가 하나되어 살신성인하여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라고 촉구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일제의 병탄 이후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이며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종서거와 2·8 독립선언

독립에 대한 열망은 1918년부터 해외와 국내 곳곳에서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마침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사주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했고 민심은 크게 분노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하며 총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원들이 청원서와 선언서를
여러 나라의 대사관과 일본 정부, 국회, 신문사로 발송하고 유학생대회를 열어 일제침략행위를 설명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이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가 되었고, 2·8독립선언은 대한독립선언서와 고종 독살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8독립선언서에서 학생들은 ‘우리는 한·일 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독립과 자유민, 민주국가를 향한 열망 3·1운동

그리고 3월 1일 낮, 서울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올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한다.’며 선언서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정정당당하게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3·1운동의 시작이었다. 3·1운동은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일본에 독립 청원 등 일련의 역사적 행위가 촉발한
민족운동이었다. 사전에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계획했고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작성, 천도교 측에서 인쇄를 한 뒤 3월 1일 이전에 전국 주요 도시로 운반해 배포했다.
전날 학생들은 서울 시내 곳곳에 벽보와 선언서를 날랐고 지방에도 비밀리에 운반했다.

학생이 낭독한 독립선언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학생과 시민들은 시내로 나갔다. 탑골공원에는 강제병합 이후 1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수많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서울 시내는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평양 등 10여 개 도시에서도 독립선언식이 거행됐고 태극기가 나부꼈다.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만세 삼창을 한 뒤 경찰에 자진 체포됐다. 원래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었다. 그러나 공원에 모인 학생·시민 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들어가 그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게 됐다. 결국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하고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학생들이었다.

서울을 시작으로 도시에서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변모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서명하고 운동을 계획한 이들이 각 종교와 단체를 연합한 민족대표 33인이라면, 실제 전국적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무명의 학생과 청년들이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의 후속조치로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일제의 학살로 수많은 사람들 목숨 잃어

3·1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중국의 만주와 일본의 도쿄·오사카, 미국의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하기 시작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3월1일 첫날 일제의 발포로 시위군중이 죽었고, 제암리에서는 주민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사격을 한 후 불을 질러 학살했다. 3월부터 5월까지 통계상 3개월 동안 7,509명이 학살당했으며, 상해가 15,961명, 검거된 사람이 4만 명이 넘는다. 처음에는 평화시위를 했던 시위군중은 폭력으로 맞섰다. 농민들은 곳곳에서 낫, 곡괭이, 몽둥이, 죽창 등으로 무장을 했고 면사무소, 군청, 주재소 등을 공격해 세금징수 장부를 불태우고 순사 등을 살해했다. 3월부터 4월까지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200만 명이 넘는다.

고양군 3월 5일 용강동에서 첫 만세시위

서울에서 물꼬를 튼 3·1운동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지방의 애국지사들이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서울에서 벌어진
감격스러운 일을 전했다. 고양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양군의 3·1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양군의 행정구역을 알아야 한다. 일제강점기의 고양군은 서울의 거의를 차지해 경성부를 감싸고 있었다. 동대문 밖 돈암리와
성북리, 수유리, 우이리, 휘경리, 왕십리, 이태원 지역과 서빙고, 동빙고, 뚝섬을 포함한 화양리, 잠실리, 면목리 등과 서쪽으로는 마포의 용강면, 여의도 그리고 아현동 일대와
연희면, 독립문 밖 은평면 등이 고양군에 속했다.

3ㆍ1운동 당시 고양군은 22개면 중 1개 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모두 37회가 넘는 만세시위운동 가운데 3월22일 이후 만세운동은
지도면, 중면, 신도면, 송포면, 벽제면 등 농촌지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지 나흘 뒤 3월 5일 오전 11시 고양군 용강면 동막리(지금의 신촌 일대 대흥동)에 있는 흥여학교에서 학생 60여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펼쳤다. 고양군에서의 첫 시위였다.

이어 3월 9일 오후 한지면의 상왕십리에서 300여 명의 군중이 왕십리보통학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10일에는 연희면 수색에서 수백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행주외리의 선상만세운동

3·1운동그리고 3월 11일에는 신도면과 은평면, 벽제면, 구파발, 능곡, 봉의천, 금천 지역 일대에서 수백 명의 주민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횃불을 신호로 밤에 시위를 벌였고, 특히 지도면 행주리 주민들은 행주산성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옆으로 한강이 흘렀고, 주민들은 한강을 행주강이라
불렀다. 이곳의 주민 대부분은 고기를 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민들이었다. 주민들은 등불을 신호로 야간시위를 감행했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은 이곳은 ‘옛날 임진년에 이곳에서 왜놈들이 망했다고 하거니와 만일 쫓아오면 네놈들도 그와 똑같이 망하리라’고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행주산성는 1593년 2월 12일 하루 동안 조선군과 왜군이 전투를 벌여 조선군이 크게 승리한 곳이다. 이 전투에서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은 대첩을 이루었고, 행주대첩은
진주대첩·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린다. 이 전투에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만들어 입고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만세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은 일본경찰이 쫓아오자 행주나루터로 가 어부들과 함께 배를 띄워 오른 뒤 한강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본경찰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고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하류로 유유히 내려갔다. 이날의 시위가 행주나루터선상만세운동이다. 이날의 기록은 <3.1운동 비사>에 남겨져 있다.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3.1운동 비사>의 기록에는 3월 11일 신도면과 은평면, 벽제면, 구파발, 능곡, 봉의천, 금천에서의 만세시위를 언급하면서 행주의 선상만세시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상만세에 대한 기록은 이날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날 시위진압에 나섰던 일본경찰의 탄압을 피해 선상만세시위를 벌였던 행주리 주민들은 이후 23일과 28일에도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23일과 28일 두 차례의 만세시위에서 주민들이 11일과 같이 선상만세시위를 벌였을 것이란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에서 행주나루터선상만세운동 재현행사 날짜를 되도록 11일과 23일 또는 28일로 정해 행사를 치르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실제 행사날짜는 서해에서 들어오는 물때와 어민들의 조업상황을 고려해 행사날짜를 그때마다 변경해 치른다.

3월 23일 행주리의 만세시위와
고양군민의 만세시위

이어 3월 12일에는 뚝도면에 있는 뚝도공립간이농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이후 뜸했던 고양군민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2일부터 본격화되어 다시 타올랐다.
3월 22일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서울의 남대문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이 벌어졌으며, 서울 시내 훈련원과 동대문, 동소문 등지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고양군의 다른 지역 또한 그 영향을 받아 3월 22일 밤부터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3월 22일에는 용강면 공덕리, 염리, 동막리, 숭인면 신설리, 한지면 상왕십리, 은평변 녹번리 등지의 주민들이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였고, 3월 23일 오후에는
고양군 각처에서 적게는 50여 명에서부터 많게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독립만세를 부른 지역은 숭인변의 동묘리·청량리, 돈암리,
한지면의 왕십리, 은평면의 녹번리·신사리·역촌리, 용강면의 동막리·당진리, 마포·양화진, 지도면의 행주리, 연희면의 수색리·창천리·합정리, 신도면의 구파발리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날 밤 자정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3일 시위에서 지도면 일대 행주리 등에는 주민 8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이날 시위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주민들이 모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외에도 고양군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3월 24일과 25, 26일 고양군민의 만세시위

3월 24일에는 은평면 녹번리에서 200여 명의 주민들이 전날에 이어 다시 시위를 벌였다.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면서 헌병주재소 측에 전날 밤 검거된 시위지도자
7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주재소측이 이를 거부하자, 주민들은 주재소 건물 안으로 진입하여 구속된 자들을 빼내오려고 하였다. 또 이날 숭인면 성북리에서 60여명 이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한지면 한강리 에서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송포면 대화리에서는 오후 3시경 에 이용·최상돈 등 3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부근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만세를 부르던 주민 5∼6명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면사무소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었다. 시위자를 진압하기 위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시위군중을 방관한 면사무소의 서기 1 명과 소사 1명을 ‘폭민’ 연루자로 단정하여 체포하였다.일경에 의해 체포된 면서기와 소사는 송포면장과 중면장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다.

같은 날 신도면 능내리에서도 5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중면 일산리 에서도 16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해산했다.

3월 25일에는 송포면 덕이리에서 주민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때 출동한 헌병은 주도자 10명을 체포하고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체포된 사람 중에서는 면서기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3월 26일에는 용산과 용강면 동막리 사이에서 300여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한지면 왕십리에서도 15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다 강제 해산되었다.
이날 숭인면 회기리에서도 15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면 시위하다가 해산되었고, 숭인면 제기리 면사무소 앞에서는 주민 수백 명이 만세를 불렀는데,
정탐자의 밀고에 의해 시위를 선도했던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중면 일산리에서는 장날을 맞아 주민500여 명이 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펼쳤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중면 면장이 주민들에게 강경한 태도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가 하면, 일산의 헌병주재소에 주민들의 동향을 신고한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일본경찰의 과잉진압에 저항하여
근처 일본인 가옥을 향해 돌을 먼지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헌병은 이날 시위를 이끈 지도자 15명을 체포했다.

벽제면 대자리에서는 주민 30여 명이 전봉산에 올라가 햇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저녁 9시경 뚝도면 주민 500여 명이 동·서 뚝섬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으며,
밤 12시경에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로 만세운동의 수모자 103명이 체포됐다.

3월 28일의 행주내리와 행주외리 만세시위

3월 27일에는 숭인면의 여러 곳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청량리 부근에서 5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다가 그 중 10명이 주모자로 체포되었고, 안감천(지금의 안암천)
부근에 서도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돈암리에서도 주민 50여 명이 산 위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던 중 10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회기리에서도 주민들이 이날 밤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벽제면 관산리에서는 주민 30여 명이 가장곡산에 올라가 햇불을 피우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신도면 진관리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송포면 대화리에서는 150여 명의
주민이 시위에 나섰다가 주모자 등 30명이 체포되었다.

3월 28일에는 지도면 행주내리와 행주외리에서 5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하였으며, 주도자 등 38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날 중면의 여러 곳에서도
100명에서 150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햇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헌병에 체포된 주모자 19명 가운데 면서기 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처절한 독립의지이며 이후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여기에 동참한 행주나루터선상만세운동 역시 동시대민의 절박한 외침이었으며 3.1운동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배 위에서 시위를 벌인 유일한 만세운동이었다.